건축을 향하여
by Charlo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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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나의 눈 색깔이 다르다는 것
같은 문화권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느끼며 살아온 내 부모, 형제, 친구들도 역시 나와 같은 피부 색과 눈을 가졌지만
저마다의 다른 생각들로 얼마나 부딪히며 살아왔는지 잘 알면서도
마음이 서늘해질 때면 단순히 그대와 나의 눈 색깔이 달라서 더 슬프고 외로운건 왜일까요?
교복입고 순대꼬치 먹으면서 꺄르르 웃어재끼며 친구들과 고민이라면 그저 대학입시와 짝사랑의 아픔정도인 학창시절의 철부지였던 나를 그대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그저 자기 나라안의 이방인일뿐인 나를....
2007년, 아무것에도 기댈 곳 없었던 내가 이문세 가로수 그늘 아래를 들으며 버스안에서 수없이 삼켰던 눈물을 이해해줄 수 있을까요? 과거의 내가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겠어요..지금의 나를 보고 싹 튼 감정인데.. 그래도 조금 더 일찍 만나서 많은걸 함께 보고 느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어리숙하다해도 나약하다해도 강인하다해도 지혜롭다해도 그대는 아는가요 아는가요 내겐 아무 관계없다는 것을..

by Charlotte | 2010/12/19 04:57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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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내가 아내나 제 거동에 로직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해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서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이상의 '날개'중에서

의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비난을 두려워하고 하는, 그러한 모든 것이 도시 남자의 사랑이, 정열이, 부족한 까닭이라고 여자가 울며 탄하였을 때, 그 말은 그 말은, 분명히 옳았다, 옳았다. 구보가 바래다 주려도 아니에요,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 혼자 가겠어요, 그리고 비에 젖어, 눈물에 젖어 황혼의 거리를 전차도 타지 않고 한없이 걸어가던 그의 뒷모양. 그는 약혼한 사나이에게로도 가지 않았다. 그가 불행하다면 오로지 사나이의 약한 기질에 근원할 게다. 구보는 때로 그가 어느 다행한 곳에서 그의 행복을 차지하고 있는 것같이 생각하고 싶었어도, 그 사상은 너무나 공허하다.
   어느 틈엔가 황토마루 네거리에까지 이르러, 구보는 그곳에 충동적으로 우뚝 서며, 괴로운 숨을 토하였다. 아아, 그가 보고 싶다. 그의 소식이 알고 싶다. 낮에 거리에 나와 일곱 시간, 그것은 오직 한 개의 진정이었을지 모른다. 아아, 그가 보고 싶다. 그의 소식이 알고 싶다.

광화문통
그 멋없이 넓고 또 쓸쓸한 길을 아무렇게나 걸어가며, 문득 자기는, 혹은 위선자나 아니었었나 하고 구보는 생각하여 본다. 그것은 역시 자기의 약한 기질에 근원할 게다. 아아, 온갖 악은 인성의 약함에서, 그리고 온갖 불행이......
   또다시 너무나 가엾은 여자의 뒷모양이 보였다. 레인코트 위에 빗물은 흘러 내리고 우산도 없이 모자 안 쓴 머리가 비에 젖어 애달프다. 기운 없이 기운 있을 수 없이 축 늘어진 두 어깨. 주머니에 두 팔을 꽂고, 고개 숙여 내어디디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 조그맣고 약한 발에 아무러한 자신도 없다. 뒤따라 그에게로 달려가야 옳았다. 달려들어 그의 조그만 어깨를 으스러지라 잡고, 이제까지 한 나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고, 나느 결코 이 사랑을 단념할 수 없노라고, 이 사랑을 위하여는 모든 장애와 싸워 가자고, 그렇게 말하고 그리고 이슬비 내리는 동경거리에서 두 사람은 무한한 감격에 울었어야만 옳았다.
   구보는 발 앞의 조약돌을 힘껏 찼다. 격렬한 감정을, 진정한 욕구를, 힘써 억제할 수 있었다는 데서 그는 값 없는 자랑을 얻으려 하였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이 한 개 비극이 우리들 사랑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려 들었던 자기. 순간에 또 벗의 선량한 두 눈을 생각해 내고 그의 원만한 천성과 또 금력이 여자를 행복하게 하여 주리라 믿으려 들었던 자기. 그 왜곡된 감정이 구보의 진정한 마음의 부르짖음을 틀어막고야 말았다. 그것은 옳지 않았다. 구보는 대체 무슨 권리를 가져 여자의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감정을 농락하였나. 진정으로 여자를 사랑하였으면서도 자기는 결코 여자를 행복하게 하여 주지는 못할 게라고, 그 부전감이 모든 사람을, 더욱이 가엾은 애인을 참말 불행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니었던가. 그 길 위에 깔린 무수한 조약돌을, 힘껏 차 흩트리고, 구보는 아아, 내가 그릇하였다. 그릇하였다.
   철겨운 봄 노래를 부르며, 열 살이나 그밖에 안 된 아이가 지나갔다. 아이에게 근심은 없다. 잘 안 돌아가는 혀끝으로, 술주정꾼이 두 명, 어깨동무를 하고 수심가를 불렀다. 그들은 지금 만족이다. 구보는 문득 광명을 찾은 것 같은 착각을 느끼고 어두운 거리 위에 걸음을 멈춘다. 이제 그와 다시 만날 때, 나는 이미 약하지 않다. ........그러나 그를 어디 가 찾누. 어허, 공허하고 또 암담한 사상이여. 이 넓고 또 훠엉한 광화문 거리 위에서, 한 개의 사나이 마음이 이렇게도 외롭고 또 가엾을 수 있었나. 각모 쓴 학생과 젋은 여자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구보 앞을 지나갔다. 그들의 걸음걸이에는 탄력이 있었고, 그들의 말소리는 은근하였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그대들 사랑에 언제든 다행한 빛이 있으라. 마치 자애 깊은 부로와 같이 구보는 너그러웁고 사랑 가득한 마음을 가져 진정으로 그들을 축복하여 준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by Charlotte | 2010/09/13 05:29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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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도마 갈라진 틈에서 작은 벌레 나올때
맛있고 비싼 음식을 나 혼자 먹을 수 없는 환경을 깨달을때
거짓말로 둘러싸인 사람들 속에서 같이 웃고 떠들고 똑같은 사람이 되어있을때
아무런 희망이 안 보일때
노트북 화면 자꾸 심하게 깜빡일 때
옆 방에서 한국 쇼프로 크게 틀어놓고 웃을때
그 옆 방 여자가 저녁에 밥 왕창 먹고 소화 안되어서 계속 헛트림 할때
알바를 해야만 여기서 발 붙히고 살 수 있다고 간절히 느낄때
가족이 나에게 실망을 안겨줄때
이 빌어먹을 컴퓨터 세상이 깜빡할새 자꾸 발전해서 세상일들을 더 복잡하게 만들때
단순함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낄때
살아보니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사는거 다 똑같이 느껴질때
내가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할거 같다고 느낄때
뉴스에서 29살 젊은이가 작업하다가 용광로에 빠져 숨졌다는 기사를 읽을때
내가 건축에 관심과 재능이 없다고 느낄때
나는 한국에 가고싶다.
나름 큰 뜻을 품고 바다건너 산넘어 내 나라에서 멀디 먼 곳에 왔는데
그 큰 뜻은 어디로 가고 저런 작은 순간을 마주칠 때마다 내 마음은 한없이 동요된다.
미래의 내가 만족스럽고 행복하기 위해서 지금의 나를 투자하고 인내하며 소중한 것들을 알면서도 버려두고
꼭 그렇게 지금을 살아야만 할까? 정말.



by Charlotte | 2010/09/08 05:05 | 트랙백
은호아버지가 은호에게 (연애시대 대사中)

- 저는 원주 사는 k라고 하는데요

  좋아하는 남자가 있거든요

  오래전부터 좋아했는데

  최근에야 그 사람없이는 안되겠구나 알게되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이미 결혼한 사람이에요

  어떡하죠? 내가 어떡해야 할까요?

 

 - k양 본인 마음은 확실한 겁니까?

   정말 그 남자 아니면 안 되는 겁니까?

 

 - 어떨 때는 그럭저럭 살 수 있을거 같다가도

   또 어떨 때는 이대로는 못 견디겠다

   그냥 눈물이 나올 때도 있고 멍해질 때도 있고 그래요

   그 사람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부터는

   사는게 지루해졌어요

 

 - 상대방 마음은 어떻습니까?

 

 - 그 사람은 나랑 다시 시작하고 싶어해요

 

 - 힘든 문제군요

 
 - k양 하느님은 속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 역시 안되겠죠?

 

 - 남을 속여서도 안되지만

   또한 자기 자신을 속여서는 안됩니다

   마음이 가는대로 하십시오

 
- 그게 무슨


 - k양 그 사람 아니면 안되겠다고 마음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 역시 케이양 아니면 안되겠다고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하십시오

 

 -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그 사람 부인은 어떻게 해요

   내가 축가까지 불러줬는데

   둘이 행복하라고 .. 그렇게 말했는데

 

 - 진심이셨습니까?


 - 네


 - 지금의 진심은 무엇입니까?

 - 죄를 지을 순 없어요

 - 죄를 짓기 때문에 인간입니다

   K, 행복해지고 싶죠?

   행복하기가 쉬운 줄 아십니까?

   망설이고 주저하고 눈치보고 그렇게 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노력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는 겁니다
  
은호야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

   네가 행복해 져야만 이 세상도 행복해진다

   하느님한테는 내가 같이 용서를 빌어주마
   행복해져라, 은호야.

 

 

by Charlotte | 2010/04/26 07:36 | 트랙백
정기용 건축가
기용건축 정기용 소장은 MBC TV <느낌표>를 통해 소개된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로 친숙하다. 그에 대해 혹자는 흙 건축의 대가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혹자는 환경친화적인 건축가 또는 생태 건축가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몇 가지 단서로 그를 온전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 수식어들은 그의 부분들을 설명하는 말이기에. 그는 위로는 하늘을, 아래로는 땅을, 좌우 사방으로는 이웃을 두루 살펴보며 집을 설계하고 짓는다. 전체 속의 하나여서 주변에 묻히는 건축물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드넓은 주변을 넉넉한 풍경으로 받아들이는 중심이 된다
나의 시선이 닿는 데까지가 나의 집
인간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건축의 역사도 시작되었다고 한다. 말 없이는 개개인의 의사를 전달하고 의미를 표현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집 짓기는 맹수와 자연재해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고 평안하게 거주하려는 바람과 생활 의식, 삶에 필요한 공간을 짜서 이루거나 얽어서 만드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집은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의 바람과 목적이 실현된 결과이자 새로운 삶을 조직하는 바탕이다. 마당이 있는 집과 없는 집의 차이는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시작되어 건축으로 드러나고 다시 삶으로 이어진다.

‘나의 시선이 닿는 데까지가 나의 집’이라고 생각하는 정기용 소장의 집은 백만 평이다. ‘방’은 종로구 명륜동에 세 들어 사는 서른한 평 다가구 주택이고, 정원은 성균관대 입구에 있는 명륜당(고려시대 말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유학을 가르치던 강당) 앞마당이다. 뒷산으로 오르면 종묘와 창덕궁, 창경궁과 창경궁의 후원이 맞닿는 와룡공원에 서면 서울의 아늑한 전경이 펼쳐진다. ‘방’에서 혜화동 한국방송대학 옆에 있는 기용건축 사무실까지는 걸어서 10분이면 닿는다. 그래서 그의 집은 백만 평이다. 허허허,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닐까?
그는 1945년 광복이 되던 해 충청북도 영동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공예를 전공했다. 이후 미의 분배와 사회적 유용성, 사회적 역할에 대한 깊은 사유 끝에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장식미술학교 실내건축과, 파리 6대학 건축과, 파리 8대학 도시계획과를 졸업하면서 건축가가 되었다. 처음으로 의뢰를 받아 건축 일을 했던 것은 파리에 머물던 1978년. 귀국해서는 계원예술대학, 서울예전 드라마센터 레노베이션, 효자동 사랑방, 무애빌딩, 무주의 공공시설 31곳 등 건축뿐 아니라 ‘느림의 도시 순천’ ‘무주 기업도시’ 등의 도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더불어 춘천 자두나무집, 영월 구인헌 등 개인 주택 작업이나 지평선 중학교 기숙사 작업 등을 통해서는 흙 건축의 현대화 작업에 지속적으로 매진해왔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건축 설계와 이론을 가르쳤던 그는 올해 초 성균관대 석좌교수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최근 작업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개인 주택, 정읍 기적의 도서관 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정 소장님에 대해 ‘흙 건축의 대가’라고 말하곤 합니다.”
“반쯤은 맞고 반쯤은 오해입니다. 흙 건축은 정기용 건축의 한 부분이지 전체는 아니에요. 건축이라는 말도 좀 그래요. 건축을 하는 데 흙을 쓴 것이지, 흙 건축을 한 건 아니니 ‘흙 건축을 합니다’ 하는 것은 좀 과장된 것 같아요. 제가 친환경 건축, 생태 건축의 전문가도 아니거든요. 그저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올바른 건축을 하려다 보니 흙도 동원하고 때로는 나무도 동원하게 되는 것이죠. 흙으로 모든 건축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에요.”
“다른 건축가들에 비해 흙 건축 작업을 많이 하셨지요?”

.“몇 개 더 한 것은 맞지만 그것으로 정기용 건축을 규정하려는 것은 오해지요. 흙 건축이 위대한 건축이 아니라거나 그런 호칭이 싫어서가 아니에요. 오히려 그것이 정기용의 건축 세상을 이해하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 같아 그래요. 한국에서 건축하는 사람이 흙을 주제로 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흙을 주제로 삼는 건축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니요?”

“한국 땅에 살던 선조들이 건축 소재로 쓰던 것이 나무하고 흙이거든요. 그러니 그 후손이 건축에 흙을 쓰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다만 사람들이 시도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가 흙 건축을 탐구하게 된 것은 화가 나서다.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하던 1980년대, 흙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자료를 찾았는데 도무지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흙과 나무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기본 소재. 이토록 중요한 소재에 대한 자료가 없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목마른 이 우물 판다고, 직접 찾아다니고 공부하고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흙 건축에 대해 열심이세요?”
“흙과 나무에 대한 연구가 이미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없다는 데 놀란 거죠. 그러니 어떻게 하겠어요. 직접 배우고, 흙으로 요새 사람들의 삶을 담을 수 있는 건축을 할 수 있는지 실험도 해보았지요.”
“실험하신 뒤 내린 결론은 무엇인가요?”
“담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근사하게 건축할 수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개인 주택도 흙 건축이 포함되는지요?”

“전부 다 흙으로 짓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 흙과 나무를 이용해서 짓습니다. 우리나라 농촌 풍경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소재를 선택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집이라는 것은 직접 사는 사람 외의 사람에게는 그저 풍경으로 보이기 때문에 풍경도 하나의 중요한 삶의 요소입니다.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보는 것이지요.”
종이라는 바탕이 있어야 글씨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풍경이 없으면 개별 건축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 개별 건축이 주인공이자 풍경이 되는 정신, 이는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미학이기도 하다.


강원도 춘천의 흙집 ‘자두나무집.’ 건축주 정상명 씨는 이 집이 자연에 은둔하는 집이기를 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
지난 5월 그는 가정의 달을 맞아 여성가족부에서 수여하는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여성가족부는 그가 순천·대구·서귀포·진해 어린이 도서관과 학교 등 건축물을 가족친화적인 공간으로 설계하고 건축함으로써 지역공동체 문화 조성에 기여했음을 높이 샀다. 건축 단체의 장이 아닌 개인 건축가가 국민훈장을 받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

그의 손을 거친 작업 모두가 그의 건축 철학을 보여주지만 어린이 도서관에서는 특히 살펴볼 점이 많다. 도서관의 주인인 어린이들을 어느 한 나라의 국민이기 이전에 국경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세계인’이라는 생각에서 계획한 이 작은 우주는 책을 매개로 상상의 여행을 떠나는 특별한 장소, 자연과 친구가 되는 공간이다. 건물이 허물어질 때에는 녹여서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쇠로 내부를 지탱하게 만들고, 외부는 나무로 에워쌌다. 열람실 안에는 흙을 두어 대나무를 심고, 건물 옥상에는 물이 흐르게 하고, 천장에는 하늘을 향해 둥그렇게 열린 창을 만들었다. 도서관 밖에는 바람개비를 세움으로써 지구의 숨결을 바라보고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놀랍게도, 이 작은 도서관이 말 그대로 기적을 일으켰다. 어린이 도서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나라에서 이루기 어려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도 그러하지만 그보다는 이 작은 도서관 하나가 만들어진 뒤 순천 사람들의 삶에 변화가 왔기 때문이다. 어린이 도서관을 중심으로 이웃과 더불어 생활하는 공동체 문화도 되살아났다. 엄마와 아이는 물론이고 할아버지와 손자가 나란히 도서관을 다니는 풍경이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처음 건축을 공부할 때부터 총체적 관점에서 바라본 건축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제 머릿속에서 건축이 누구의 소유 대상이라거나 재산의 대상으로 그려지지 않았던 걸 보면 성숙하지 않았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정 소장님의 총체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건축의 최선을 예를 들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여러 개여서 단적으로 이야기하기 어렵네요. 가장 작은 건물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20만 명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노트르담 사원 뒤편에 있는 기념관을 말할 수 있겠네요. 팽귀송Pinguisson이라는 프랑스 건축가의 작품이에요. 이 사람이 위대한 건축가는 아니지만 이 작품 하나만은 근사해요.”
“어떻게 생긴 건축물인가요?”

“이 기념관은 건물이 없어요. 20만 명을 애도하는 공간을 어떻게 만들 수 있겠어요? 사실, 만들어서도 안 되고, 만들 수도 없어요. 하지만 그래도 만들어야 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너무 근사하게 보여주는 건물입니다. ‘건축은 사람이 체험함으로써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얘기해주는 건물이에요. 40~50평이나 될까? 아주 감동적인 곳이지만 건물이 없어서 사람들이 안 가요. 센 강 쪽으로 나 있는 계단 밑으로 내려가야 해요. 내려가면 지하에 조그만 공간이 있어요. 계단은 두 사람이 함께 내려가기에도 비좁을 정도이고, 내려가서도 한 사람씩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죽음을 기념하는 공간은 여러 사람이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아니에요. 아무리 집단적인 죽음도 개별적이거든요. 사람 하나하나의 기억이 있고 역사가 있고…. 그래서 소중하지 않겠어요? 내려가면 마당이 있고 도시의 소음이 사라지죠. 거기에는 조그만 조형물이 있을 뿐이고 볼 게 없어요. 그런데 돌아서면 거기에 좁은 관 같은 문이 서 있어요. 폭이 70cm쯤 될까? 그 문을 따라 구석으로 들어가면 감방 같은 게 하나 있고 꺼지지 않는 불이 있어요. 진열된 것은 하나도 없어요. 텅 비어 있는 가운데 아우슈비츠 등의 강제수용소 이름들이 적혀 있지요. 그곳으로 들어가면 나오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이때 사람들은 상상을 하게 돼요. 죽음에 대한 공간, 억압에 대한 공간, 전쟁과 공포에 대한 공간 등 사람들 내면에 있는 모든 공간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자유를 환기시키는 굉장히 근사한 건축물이에요. 이것을 뒤집어 이야기하면 ‘좋은 건축은 우리 내면에 있는 것’임을 근사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건축을 처음 공부하는 사람은 필수적으로 방문해야 되는 곳이에요.” 받아들이는 중심이 된다.
덕수궁이나 경복궁 같은 고궁에 가면 마음이 편해진다. 좋은 생각을 하게 되고, 나쁜 기억도 다시 해석해 좋은 기억으로 바꿔놓기도 한다.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면 아름다운 생각을 하게 되고, 꿈을 꾸게 된다. 그의 정원인 명륜당에 가면 고요하고 풍요로운 그 무엇이 마음을 평온하게 이끌어준다. 전쟁 기념관이나 희국립묘지 등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과 같은 사회가 존재할 수 있음을 돌아보게 된다. 더불어 저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흔히들 ‘과거는 미래’라고 하는 것은 같은 일들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기 때문은 아닐까?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건축이란 마음을 인도하는 매개이니, 진정 행복한 건축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개 건물을 완공한 다음에는 다시 가지 않지만 어린이 도서관만큼은 가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그 까닭은 무엇인가요?”
“건축가는요, 자기가 설계한 집에 가면 결점만 보여요. 잘된 건 안 보여요. 그런데 어린이 도서관에 가면 건물이 안 보이고 아이들이 보여요.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어요. 아이들이 서가에서 책을 뽑아 들고 창가로 가서 열중해서 책 읽는 걸 보면, 뭐라 해야 하나… 그 순간 천지개벽하는 것 같아요.”
“천지개벽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 아이 스스로 교육개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교육에는 아이들의 자율성이 실종되어 있거든요. 공부를 하기 위해서 책을 보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즐겁기 위해 책을 읽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죠. 그리고 아주머니들에게 ‘(어린이 도서관이 있어서) 아침에 일어나는 게 행복하다’는 소리도 들을 수 있어요. 그곳에 가면 인간의 건축을 체험하는 다른 인간이 행복해하는 걸 눈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미술, 건축, 도시계획 등 공부를 많이 하셨는데….”

“욕심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질문에 허기가 져서요.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을 때 전공을 바꾼 것 같아요.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 다른 질문이 생겨요. 건축과를 졸업하고 도시계획과를 간 것도 마찬가지예요. ‘왜 이 땅에는 집만 지으라고 했을까? 주거지역, 공장지역 등의 결정은 누가 왜 무슨 근거로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을 알고 싶다고 생각했지요. 물론 도시계획과에서 한다는 것을 짐작으로 알지만 ‘나도 모르는 사람의 하수인이 되어서 일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시작했어요. 천성이 종속되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요. 나한테 제일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이에요.”

변화하는 한가운데 있어 행복하다 그의 말을 듣노라면 건축적인 표현을 많이 듣게 된다. ‘건축은 삶을 조직한다’거나 ‘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건축가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이 그렇다. 사전을 찾아보니 조직이라는 말은 ‘짜서 만들거나 얽어서 만듦’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 소장님 댁은 어떻게 조직되어 있나요?”
“저 같은 경우에는 세 가지 정도 버릇이 있어요. 늘 창을 열어두고 살고 가급적이면 좀 비우고 살아요. 어느 집이든 소도구와 잡동사니를 늘어놓은 다음부터는 공간이 제한돼요. 오히려 결정되지 않은 잠재된 상태가 가장 매력적이지요. 그리고 세 번째는 집에 대해 얽매이지 않으려고 해요.”
“말씀을 들어보면 창을 중시하시는 것 같아요. 사람이나 집에서 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모든 건축가들이 창에 대해 읊었는데, 내가 생각하는 창은 우리가 말하는 세계, 세계와 나를 이어주는 통로예요. 특히 건물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것은 세계가 압축적으로 그 사람에게 내면화되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 되죠. 사람이 존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계와 관계를 맺는 것이에요.”
“정 소장님의 ‘방’에서 보는 창밖은 어떤 세상인가요?”
“특별한 것이 있어요. 거기에는 여러 종류의 풍경이 있어요. 낙산도 있고, 학교 건물도 있고, 아파트도 보이고, 다가구 주택도 있어요. 주택 옥상에서 배추 키우는 아주머니도, 옥상에서 며느리에게 된장 담그는 걸 가르치는 시어머니도 보여요. 사라져가는 한옥에 마지막으로 옷을 해 입힌 수의(비 새는 것을 막기 위해 지붕에 씌운 천막)도 보여요. 창을 통해서 내다보는 풍경은 멀리도 있고 가까이에도 있어요. 그러나 그것들은 한 번도 고정된 적이 없어요. 늘 미세한 변화를 끊임없이 생성해요. 기후 때문에도 그렇고, 사람들이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꿈틀꿈틀 변화하는 서울의 한 조각이지만, 원경부터 근경까지 그 풍경에는 깊이가 있어요. 바로 그렇게 변화하는 한가운데에 내가 있어 행복해요.”
이곳에서 사는 7~8년 동안 그는 비가 오는 날, 눈이 오는 날, 새벽 아침, 늦은 밤, 시시때때로 똑같은 각도에서 바라본 풍경을 카메라로 수백 번 찍었다고 한다.

“건축 일을 하면 좋은 점이 무엇인가요?”
“여러 종류의 사람과 여러 종류의 세상을 만날 수 있어요. 땅도 만나고, 사람도 만나고, 기계도 만나고, 시대도 만나고, 기술도 만나고.”
“지금까지 만난 건축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무서운 건축주가 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건물 설계를 의뢰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합당한 돈을 지불할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돈만 주는 사람이고, 당신은 그 돈으로 설계를 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설계를 할 수 없어서 당신에게 맡기는 것이므로 이것은 나의 작품이 아니라 당신의 작품입니다’라고 말하는 이분은 아마 소설가여서 작가 정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작가를 가장 잘 부리는 방법은 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임을요.”
“행복한 세상은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어렸을 때였던 것 같아요. 제일 좋은 세상은 앞으로 올 세상이 아닌 것 같아요. 지나간 것 같기도 하고…. 제일 근사하고 행복한 세상은 고르게 가난한 사회인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그냥 즐겁게 살고 싶은데…. 사는 것의 기적을 느끼면서 그걸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러려면 마음을 비우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물을 사랑하고 나무를 사랑하고, 이런 것이 지속되면 좋겠어요.”
그는 지금도 그렇게 보이지만 참 맹렬하게도 살았던 것 같다. ‘참 좋았던 것 같아’라고 기억하는 50대 시절에는 하루를 48시간처럼 썼다. 저녁 10시에 퇴근해 집에서 또 다른 일을 하다 새벽 4시쯤 잠들었다. 약속 시간을 3분 단위로 쪼개 하루에 여섯 번의 미팅을 하던 때도 있었다.

얼마 전 그는 깊은 병을 알았다. 병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선택해 슬기롭게 대처했던 그는 발병에 대해 '육신과 정신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었다'고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해설자처럼 담담하게 말한다. 그러나 '매일 매일이 기적이고 바람 불고 구름이 지나가고 비 내리는게 우주 쇼'라는 그의 말을 들으며, 하하하,웃을 수만은 없었으니...

-행복이 가득한 집2007년 8월호 퍼옴-
by Charlotte | 2009/06/16 06:55 | 트랙백(1)
정기용 건축가의 인터뷰
-->5월 23일 토요일 하루 종일 찌푸린 하늘아래 가랑비가 흩뿌렸다. 가슴이 에린다. 끊임없이 눈물이 고인다. 부엉이바위는 계속 내 눈 앞에 나타나 시야를 흐리게 한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어야하고, 지금 떠나서는 안 되는 분을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심경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꼭 그렇게 해야 한다면 오늘 나는 고백해야만 한다. 그동안 가슴속에 꾹꾹 참아왔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아야만 하겠다.

마지막 가시는 길을 위해 나는 두 가지를 밝힌다. 한가지는 세상 사람들이 텔레비전 카메라를 통해서 바라보는 봉하마을 사저에 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통령이라기보다는 귀향한 한 농촌인으로서 ‘농부 노무현’이 꿈꾸던 소박한 세계를 알리는 것이다. 오늘의 이 비통함과 가슴 저리는 심경 속에서 우리가 갖춰야 되는 최소한의 예의는 고인에게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왜곡된 사실들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다. 봉하마을의 사저는 내가 설계했기 때문에 내가 제일 잘 안다. 노 전 대통령의 자택은 흙과 나무로 만든 집이다. 그런데 항간에서는 ‘봉하아방궁’이라는 말로 날조해서 사저를 비하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나는 대통령에게 내가 나서서 기자회견을 해야겠다고 간청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래봐야 아무소용이 없으니 참으라고 하셨다.

노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귀향 이유로 “아름다운 자연으로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농촌에서 농사도 짓고 마을에 자원봉사도 하고, 자연도 돌보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옛날 우리 조상들이 안채와 사랑채를 나누어 살았듯이,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할 때는 신을 신고 밖으로 나와서 이동하는 방식을 권유했다. 대통령은 흔쾌히 동의하셨다.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나라에서 권위주의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확장한 분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이다. 건축가는 안다. 건축주가 누구이며 집을 통해 무엇을 실현하려는지.

노무현 대통령은 결국 “지붕 낮은 집”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봉하마을 주민들의 농촌소득 증대사업을 유기농법으로 전환시키고, 봉화산과 화포천 일대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치유하며, 궁극적으로는 청소년을 위한 생태교육의 장을 만들고자 하셨다. 재임 시절 풀지 못한 숙제 중 하나인 농촌 문제를 스스로 몸을 던져 부닥치려는 대통령의 의지는 퇴임 뒤 일년 내내 쉴 새 없이 지속되었다. 마을 뒷산 기슭에 ‘장군차’도 심을 예정이었고, 마을 마당 앞뜰에는 특산물매장도 꾸리고 ‘노무현표’ 쌀도 팔 계획이었다. 특히 마을장터 지하 쪽에 작은 기념도서관 건립도 꿈꾸고 계셨다. 민주화운동 시절 당신이 가까이했던 민주주의에 관한 책들, 당시 젊은이들의 양식이었던 모든 책들을 모아 작지만 전문적인 ‘민주주의 전문도서관’을 구상하고 계셨다. 농사도 짓고, 자연과 생태를 살리고, 나아가서는 봉화산자락 부엉이바위 밑에 작은 동물농장을 만들어 청소년들과 함께 하려는 생각들이 바로 인간 노무현 대통령이 꿈꾸던 소박한 꿈들이었다. 그리고 틈틈이 폭넓은 독서에 빠져 통치시절을 정리하며 집필 작업에 임하셨다. 독서와 토론은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마을에서 즐기던 값진 삶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대통령은 결국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것은 내 탓이다. ‘산은 멀리 바라보고 가까운 산은 등져야한다’는 조상들의 말을 거역하고 집을 앉힌 내 탓이다. 봉화산 사자바위와 대통령이 그토록 사랑하던 부엉이바위 가까이에 지붕 낮은 집을 설계한 내 탓이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자. 그가 목숨을 던져 우리들에게 남긴 질문들을. 한국 현대사 속에 심연처럼 가로놓인 질곡, 멍에, 허위의식, 인간의 탈을 쓴 야수성들. 이 모든 것을 안고 간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나는 순교라고 밖에 달리 부를 말이 없다. 나는 부엉이바위 밑에 만들 동물농장 그림을 보여주기로 한 약속을 못 지킨 채, 지금 봉하마을로 내려간다. 대통령은 지금도 바로 거기에 계시므로.

 

정기용 / 건축가

 


건축은 박스안에 사람을 몰아넣고 이런저런 것이다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다.

사상과 살고 싶은 모습에 따라 순응해 지어지고, 그 삶을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http://carasss.egloos.com/4959815

by Charlotte | 2009/05/28 07:13 | 트랙백
‘정치사에 남을 명연설’ 찬사 쏟아진 오바마 필라델피아 연설 全文
[신동아]

‘We the people, in order to form a more perfect union.’

Two hundred and twenty one years ago, in a hall that still stands across the street, a group of men gathered and, with these simple words, launched America´s improbable experiment in democracy. Farmers and scholars; statesmen and patriots who had traveled across an ocean to escape tyranny and persecution finally made real their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t a Philadelphia convention that lasted through the spring of 1787.

‘우리 미국인은, 보다 완전한 통합을 위하여.’

221년 전, 길 건너편 회관에 모인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 단순한 말로, 불가능해 보이는 민주주의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농부와 학자, 정치가와 애국자 등 폭정과 처형을 피해 바다를 건너온 이들이 1787년 봄 필라델피아에서 진정한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1781년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후, 1783년 13개 식민지가 독립했다. 독립 후 13개 주는 연방주의와 분리주의로 대립했으나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소집된 헌법제정회의를 통해 연방주의, 삼권분립, 민주주의 원칙을 담은 합중국 헌법이 제정됐다.

오바마 민주당 상원의원은 경쟁 후보 측에서 유색인인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의혹을 확산시키고 이것이 흑인들의 분노, 나아가 인종 간 균열로 이어질 기미가 보이는 시점에 필라델피아 내셔널헌법센터에서 연설했다. 그는 독립선언에 담긴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지적하고, 이를 메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The document they produced was eventually signed but ultimately unfinished. It was stained by this nation´s original sin of slavery, a question that divided the colonies and brought the convention to a stalemate until the founders chose to allow the slave trade to continue for at least 20 more years, and to leave any final resolution to future generations.

Of course, the answer to the slavery question was already embedded within our Constitution - a Constitution that had at its very core the ideal of equal citizenship under the law; a Constitution that promised its people liberty, and justice, and a union that could be and should be perfected over time.

이들이 만든 헌법이 마침내 발효됐지만, 궁극적으로 완료된 건 아니었습니다. 이 헌법은 미국의 원죄인 노예제로 얼룩졌습니다. 노예제 문제는 (13개) 주(州)를 분열시키고, 제헌의회를 교착상태에 빠뜨렸습니다. 미국의 창시자들이 노예무역을 허용하고, 뒷일은 후대에 맡기기로 결정할 때까지 최소 20년 넘게 말입니다.

물론, 노예제에 대한 대답은 이미 우리 헌법에 들어 있었습니다. 헌법은 ‘법 앞에 평등한 시민’이라는 이상을 핵심으로 삼았으며, 국민에게 자유와 정의,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해질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통합을 약속했으니까요.

(founders, Founding Fathers: 미국 헌법 제정에 참여한 사람들을 미국의 창시자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노예소유주였다.)

오바마의 할머니 세라 아냥고 오바마(86). 케냐에 있는 그녀의 집은 미 대선에 출마한 손자 버락 오바마 덕에 요즘 문전성시다.

And yet words on a parchment would not be enough to deliver slaves from bondage, or provide men and women of every color and creed their full rights and obligations as citizens of the United States. What would be needed were Americans in successive generations who were willing to do their part - through protests and struggle, on the streets and in the courts, through a civil war and civil disobedience and always at great risk - to narrow that gap between the promise of our ideals and the reality of their time.

그러나 양피지에 적힌 단어만으로는, 노예를 해방하고 피부색과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남녀에게 미국시민의 완전한 권리와 의무를 제공하는 데 충분치 않았을 겁니다. 필요한 것은 바로, 기꺼이 자신의 몫을 다하고자 한 다음 세대의 미국인이었습니다. 거리와 법정에서의 항의와 투쟁, 내전과 시민불복종을 통해 늘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면서, 우리의 이상이 약속한 바와 시대적 현실의 격차를 좁히려는 사람들 말입니다.

(a civil war: 노예제도를 반대한 북부공화당 링컨 대통령의 당선으로 촉발된 남북전쟁(1861~65년)을 가리킨다. civil disobedience: 1950~70년대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도한 비폭력 흑인인권운동을 주로 지칭한다.)

This was one of the tasks we set forth at the beginning of this campaign - to continue the long march of those who came before us, a march for a more just, more equal, more free, more caring and more prosperous America. I chose to run for the presidency at this moment in history because I believe deeply that we cannot solve the challenges of our time unless we solve them together - unless we perfect our union by understanding that we may have different stories, but we hold common hopes; that we may not look the same and we may not have come from the same place, but we all want to move in the same direction - towards a better future for our children and our grandchildren. This belief comes from my unyielding faith in the decency and generosity of the American people. But it also comes from my own American story.

우리가 선거캠페인 초기에 설정한 과제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간 사람들의 긴 행진을, 더욱 공정하고 더욱 평등하고 더욱 자유롭고 더욱 잘 보살피며 더욱 번영한 미국을 향한 행진으로 이어가는 것 말입니다. 제가 하필 이 시점에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로 한 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풀지 않는 한 우리 시대의 과제를 풀 수 없다고 깊게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각기 다른 사연을 가졌지만 희망은 같다는 점, 생김새나 출생지는 달라도 자식과 손자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남겨주고 싶어 한다는 점에선 지향하는 바가 같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완벽한 통합을 이뤄내야만 합니다. 이러한 신념은 미국 국민의 품격과 관용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없는 제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제 자신의 아메리칸 스토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I am the son of a black man from Kenya and a white woman from Kansas. I was raised with the help of a white grandfather who survived a Depression to serve in Patton´s Army during World War II and a white grandmother who worked on a bomber assembly line at Fort Leavenworth while he was overseas. I´ve gone to some of the best schools in America and lived in one of the world´s poorest nations. I am married to a black American who carries within her the blood of slaves and slaveowners - an inheritance we pass on to our two precious daughters. I have brothers, sisters, nieces, nephews, uncles and cousins, of every race and every hue, scattered across three continents, and for as long as I live, I will never forget that in no other country on Earth is my story even possible.

저는 케냐 출신의 흑인남성과 캔자스 출신의 백인여성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저를 키워주신 백인할아버지는 경제공황을 딛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패튼 군단에서 복무했으며, 할아버지가 바다 건너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백인할머니는 포트 리븐워드에 있는 폭격기 제조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가장 좋다고 손꼽히는 학교를 나왔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산 적도 있습니다. 노예의 피와 노예소유주의 피를 함께 물려받은 흑인 미국여자와 결혼해서 이 혈통을 사랑스러운 두 딸에게도 물려주었습니다. 다양한 인종의 제 형제자매와 조카들, 삼촌과 사촌들은 다양한 피부색을 지닌 채 3개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저는 사는 동안, 지구상 어디에서도 저와 같은 경우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패튼의 기갑군단은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의 로멜 전차군단을 분쇄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바마의 케냐 출신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는 오바마가 어릴 적에 이혼했다. 그 후 어머니가 인도네시아인과 재혼해 여동생이 태어났고,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살기도 했다. 어머니는 얼마 후 이 인도네시아인과 헤어졌다. 이런 가족사로 인해 오바마의 친척들이 미국과 아프리카, 아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다.)

오바마 상원의원이 3월3일 미국 오하이오 주 웨스터빌의 한 고등학교에서 열린 유세 현장에서 지지자들과 악수하며 환호에 답하고 있다.

It´s a story that hasn´t made me the most conventional candidate. But it is a story that has seared into my genetic makeup the idea that this nation is more than the sum of its parts - that out of many, we are truly one.

Throughout the first year of this campaign, against all predictions to the contrary, we saw how hungry the American people were for this message of unity. Despite the temptation to view my candidacy through a purely racial lens, we won commanding victories in states with some of the whitest populations in the country. In South Carolina, where the Confederate Flag still flies, we built a powerful coalition of African-Americans and white Americans.

이런 사연이 저를 과거의 후보자들과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미국이란 나라가 단지 그 구성원들을 모두 더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라는 생각을 제 유전인자에 각인했거든요.

우리는 선거캠페인 첫해 내내, 모든 예측을 뒤집고 미국 국민이 얼마나 이러한 통합의 메시지를 갈구해왔는지를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저의 입후보를 순전히 인종적 렌즈를 통해 보려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백인이 밀집한 여러 주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아직도 동맹기가 나부끼고 있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조차 우리는 흑인과 백인의 강력한 연대를 이뤄냈습니다.

(Confederate: 미국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도 유지를 주장하며 미연방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남부동맹을 지칭한다.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 앨라배마, 플로리다, 조지아,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텍사스 등 7개 주가 참여했다.)

This is not to say that race has not been an issue in the campaign. At various stages in the campaign, some commentators have deemed me either “too black” or “not black enough.” We saw racial tensions bubble to the surface during the week before the South Carolina primary. The press has scoured every exit poll for the latest evidence of racial polarization, not just in terms of white and black, but black and brown as well. And yet, it has only been in the last couple of weeks that the discussion of race in this campaign has taken a particularly divisive turn.

그렇다고 이번 선거에서 인종이 전혀 이슈가 아니었다는 건 아닙니다. 이번 선거의 여러 국면에서, 저를 “지나치게 흑인”이라거나 또는 “흑인이라고 보기엔 충분치 않다”고 논평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예비선거를 앞둔 일주일 동안 인종적 긴장이 표면으로 들끓는 것을 보았습니다. 언론은 출구조사를 실시함으로써, 투표자의 인종에 따라 지지율이 양극화하는 최신 증거를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단지 흑-백뿐 아니라 흑-갈색으로까지 분류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인종에 관한 논쟁이 특히 달아오르는 것은 최근 몇 주 동안이었습니다.

(primary: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정당별 후보를 선출하는 예비경선의 한 방식. 등록된 당원만 참여할 수 있는 Caucus와 달리 당원이 아니라도 참여할 수 있어 오픈 프라이머리라고도 한다.)

On one end of the spectrum, we´ve heard the implication that my candidacy is somehow an exercise in affirmative action, that it´s based solely on the desire of wide-eyed liberals to purchase racial reconciliation on the cheap. On the other end, we´ve heard my former pastor, Reverend Jeremiah Wright, use incendiary language to express views that have the potential not only to widen the racial divide, but views that denigrate both the greatness and the goodness of our nation - that rightly offend white and black alike.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서는, 나의 출마를 놓고 인종화해를 값싸게 구입하려는 순진한 자유주의자들의 소망에서 비롯된 일종의 차별철폐조처(affirmative action)라는 식의 이야기가 들립니다. 그 반대쪽 끝에서는, 과거 나의 담임목사였던 라이트 목사가 선동적인 언어로 인종분열을 확대할 소지가 있을 뿐 아니라, 미국의 고귀함과 우수성을 모두 훼손함으로써 백인과 흑인을 모두 불편하게 만드는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Affirmative Action: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은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으로 나뉜다. 소극적인 조처로는 형식적 불평등을 철폐하기 위한 ‘불평등 대우 금지’와 같은 제도가 있다. 적극적 조처로는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기회의 평등을 파괴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소외계층을 우대하는 제도가 있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에 들어와 적극적 우대를 위한 affirmative action이 도입됐다. 미국 대학에서 신입생을 선발할 때, 흑인을 포함한 소수계층을 일정 비율로 선발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소수계우대정책이라고도 한다.)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40주기를 맞아 미국 테네시 주 멤피스의 국립 인권박물관에 그를 추모하는 화환이 걸렸다. 1968년 4월4일 킹 목사는 당시 로레인 모텔이었던 이곳 2층 발코니에 서 있다가 제임스 얼 레이라는 암살자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I have already condemned, in unequivocal terms, the statements of Rev. Wright that have caused such controversy. For some, nagging questions remain. Did I know him to be an occasionally fierce critic of American domestic and foreign policy? Of course. Did I ever hear him make remarks that could be considered controversial while I sat in church? Yes. Did I strongly disagree with many of his political views? Absolutely - just as I´m sure many of you have heard remarks from your pastors, priests or rabbis with which you strongly disagreed.

저는 이미 분명한 어조로 라이트 목사의 발언을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궁금증이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라이트 목사가 종종 미국의 대내외 정책을 극렬하게 비판한 것을 알고 있었느냐고요? 물론입니다. 라이트 목사가 교회에서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하는 것을 들은 적 있느냐고요? 그럼요. 그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느냐고요? 당연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목사나 신부, 랍비가 여러분과 아주 다른 견해를 드러내는 걸 들어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말이죠.

But the remarks that have caused this recent firestorm weren´t simply controversial. They weren´t simply a religious leader´s effort to speak out against perceived injustice. Instead, they expressed a profoundly distorted view of this country - a view that sees white racism as endemic, and that elevates what is wrong with America above all that we know is right with America, a view that sees the conflicts in the Middle East as rooted primarily in the actions of stalwart allies like Israel, instead of emanating from the perverse and hateful ideologies of radical Islam.

하지만 최근의 발언은 단순한 논란거리에 그치지 않고, 감정폭발을 일으켰습니다. 그 발언은 단순히 공공연한 부당함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려는 한 종교지도자의 노력이 아니었습니다. 이 나라의 심하게 비틀린 시각, 바로 백인우월주의를 지역 특성으로 간주하고, 미국의 잘못을 강조하는 나머지 미국의 옳은 점은 간과하며, 중동 갈등의 원인을 급진적 이슬람세력의 증오로 가득 찬 이데올로기가 아닌 이스라엘과 같은 동맹국의 영향에서 찾는 견해를 드러낸 것입니다.

As such, Rev. Wright´s comments were not only wrong but divisive, divisive at a time when we need unity; racially charged at a time when we need to come together to solve a set of monumental problems - two wars, a terrorist threat, a falling economy, a chronic health care crisis and potentially devastating climate change; problems that are neither black or white or Latino or Asian, but rather problems that confront us all.

라이트 목사의 발언은 잘못됐을 뿐 아니라, 통합이 필요한 시기에 분열을 초래했습니다. 산적한 문제들을 풀기 위해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 할 때에 인종의식으로 얽매어놓았습니다. 두 번의 전쟁과 테러 위협, 추락하는 경제, 만성적인 건강관리시스템 위기와 심각한 기후변화 같은 문제들은 흑인, 백인, 라틴계, 아시아인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Given my background, my politics, and my professed values and ideals, there will no doubt be those for whom my statements of condemnation are not enough. Why associate myself with Rev. Wright in the first place, they may ask? Why not join another church? And I confess that if all that I knew of Rev. Wright were the snippets of those sermons that have run in an endless loop on the television and YouTube, or if Trinity United Church of Christ conformed to the caricatures being peddled by some commentators, there is no doubt that I would react in much the same way.

저의 성장배경, 정치관, 그리고 가치관과 이상을 두고 본다면, 제 비판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애초에 라이트 목사와 관계를 맺은 이유가 뭐냐고 묻고 싶겠죠? 고백하건대, 제가 라이트 목사에 대해 아는 바가, 텔레비전과 유투브에 끊임없이 떠도는 파편적인 설교 수준이라면, 혹은 일부 논평가가 퍼뜨린 풍자만화에 대해 트리니티 연합교회가 사실이라고 인정한다면, 저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반응했을 것입니다.

But the truth is, that isn´t all that I know of the man. The man I met more than 20 years ago is a man who helped introduce me to my Christian faith, a man who spoke to me about our obligations to love one another; to care for the sick and lift up the poor. He is a man who served his country as a U.S. Marine, who has studied and lectured at some of the finest universities and seminaries in the country, and who for over thirty years led a church that serves the community by doing God´s work here on Earth - by housing the homeless, ministering to the needy, providing day care services and scholarships and prison ministries, and reaching out to those suffering from HIV/AIDS.

그러나 진실은, 제가 아는 라이트 목사의 모습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20년도 더 전에 처음 만난 그 사람은, 저를 기독교 신앙으로 이끌었고, 서로를 사랑하며 약한 자를 보살피고 가난한 자를 돕는 게 우리의 의무임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는 미 해병대에서 국가를 위해 봉사했고, 최고의 대학과 신학교에서 연구하고 강의했습니다. 30년 넘게 교회를 이끌며 지역사회에 봉사해왔습니다. 노숙자들을 재워주고, 빈곤한 자를 보살피고, 탁아서비스와 장학금 및 교도소 사역을 제공하고, 에이즈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등 이곳 지상에서 신의 사역을 실천해왔습니다.

In my first book, “Dreams From My Father,” I described the experience of my first service at Trinity:

“People began to shout, to rise from their seats and clap and cry out, a forceful wind carrying the reverend´s voice up into the rafters … And in that single note - hope! - I heard something else; at the foot of that cross, inside the thousands of churches across the city, I imagined the stories of ordinary black people merging with the stories of David and Goliath, Moses and Pharaoh, the Christians in the lion´s den, Ezekiel´s field of dry bones. Those stories - of survival, and freedom, and hope - became our story, my story; the blood that had spilled was our blood, the tears our tears; until this black church, on this bright day, seemed once more a vessel carrying the story of a people into future generations and into a larger world. Our trials and triumphs became at once unique and universal, black and more than black; in chronicling our journey, the stories and songs gave us a means to reclaim memories that we didn´t need to feel shame about … memories that all people might study and cherish - and with which we could start to rebuild.”

제 첫 번째 책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 트리니티 교회에서의 첫 예배 경험을 기술한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질렀다. 거센 바람이 목사의 음성을 서까래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그 한 단어, ‘희망’에서 나는 다른 어떤 소리를 들었다. 십자가 아래에서, 이 도시에 있는 수천 개의 교회 안에서, 평범한 흑인들의 이야기가,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모세와 파라오 이야기, 사자굴 속의 기독교인 이야기, 에스겔의 뼈 골짜기 이야기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이 그려졌다. 생존과 자유와 희망에 관한 이 이야기들이 우리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가 됐다. 그들이 흘린 피와 눈물은 우리의 피와 눈물이었다. 이 흑인교회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미래의 다음 세대로, 더 넓은 세상으로 전하는 함선처럼 보였다. 우리의 시련과 승리는 우리만의 독특한 것인 동시에 보편적인 것이며, 흑인의 것인 동시에 그 이상의 것이 됐다. 우리의 여정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그 이야기와 노래는 우리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었으며, 모든 사람이 연구하고 소중하게 여길 기억,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기억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수단이었다.”

That has been my experience at Trinity. Like other predominantly black churches across the country, Trinity embodies the black community in its entirety - the doctor and the welfare mom, the model student and the former gang-banger. Like other black churches, Trinity´s services are full of raucous laughter and sometimes bawdy humor. They are full of dancing, clapping, screaming and shouting that may seem jarring to the untrained ear. The church contains in full the kindness and cruelty, the fierce intelligence and the shocking ignorance, the struggles and successes, the love and yes, the bitterness and bias that make up the black experience in America.

트리니티교회에 대한 제 경험은 그랬습니다. 흑인이 많이 다니는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트리니티교회 또한 의사와 생활보조금을 받는 모자가정, 모범생과 과거의 갱단원에 이르기까지 있는 그대로의 흑인공동체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트리니티교회의 예배는 다른 흑인교회와 마찬가지로 요란한 웃음소리로 가득하고, 이따금 다소 외설적인 유머가 가미되기도 합니다. 춤과 박수, 외침과 환호로 가득 차, 여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귀에는 거슬릴 수도 있습니다. 또한 친절과 무자비함, 날카로운 지성과 놀랄 만한 무지, 역경과 성공, 사랑과 긍정, 냉소와 편견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데, 모두 흑인이 미국에서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And this helps explain, perhaps, my relationship with Rev. Wright. As imperfect as he may be, he has been like family to me. He strengthened my faith, officiated my wedding, and baptized my children. Not once in my conversations with him have I heard him talk about any ethnic group in derogatory terms, or treat whites with whom he interacted with anything but courtesy and respect. He contains within him the contradictions - the good and the bad - of the community that he has served diligently for so many years.

이것 또한 저와 라이트 목사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가 비록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제겐 가족과 같습니다. 그는 저의 믿음을 튼튼하게 했고, 결혼식 주례를 서주었으며, 제 딸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저는 그가 대화 중에 어떤 인종에 대해서도 나쁘게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으며, 그가 알고 지내는 백인들에게 호의와 존중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대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I can no more disown him than I can disown the black community. I can no more disown him than I can my white grandmother - a woman who helped raise me, a woman who sacrificed again and again for me, a woman who loves me as much as she loves anything in this world, but a woman who once confessed her fear of black men who passed by her on the street, and who on more than one occasion has uttered racial or ethnic stereotypes that made me cringe.

저는 흑인공동체를 버릴 수 없는 것 이상으로 라이트 목사와의 인연을 끊을 수 없습니다. 백인할머니를 버릴 수 없는 것처럼 그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할머니는 저를 키우셨고, 저를 위해 끊임없이 희생했으며, 저를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분입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언젠가 길에서 흑인 남자들이 옆으로 지나가면 무섭다고 털어놨고, 종종 인종적 편견을 드러내서 저를 당혹스럽게 했죠.

These people are a part of me. And they are a part of America, this country that I love.

Some will see this as an attempt to justify or excuse comments that are simply inexcusable. I can assure you it is not. I suppose the politically safe thing would be to move on from this episode and just hope that it fades into the woodwork. We can dismiss Rev. Wright as a crank or a demagogue, just as some have dismissed Geraldine Ferraro, in the aftermath of her recent statements, as harboring some deep-seated racial bias.

이 사람들은 저의 일부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미국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변명할 여지가 없는 발언을 정당화하거나 변명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하겠죠. 단언컨대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적으로 안전한 방법은 이 사건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얼른 잊히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라이트 목사를 괴짜나 선동가라고 비난하면서 그와 관계를 끊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 (힐러리 클린턴 캠프의) 제랄딘 페라로가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하자, 심각한 인종편견을 갖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내친 사람들처럼 말이죠.

(Geraldine Ferraro: 1984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했다. 여성 최초의 부통령후보였다. 최근 힐러리 상원의원 캠프에서 자금모금을 담당했으나, ‘오바마가 백인남성이었다면 지금의 위치에 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발언한 것이 파문을 일으키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But race is an issue that I believe this nation cannot afford to ignore right now. We would be making the same mistake that Rev. Wright made in his offending sermons about America - to simplify and stereotype and amplify the negative to the point that it distorts reality.

The fact is that the comments that have been made and the issues that have surfaced over the last few weeks reflect the complexities of race in this country that we´ve never really worked through - a part of our union that we have yet to perfect. And if we walk away now, if we simply retreat into our respective corners, we will never be able to come together and solve challenges like health care, or education, or the need to find good jobs for every American.

하지만 인종갈등은 지금 이 나라가 무시해도 될 만한 이슈가 아닙니다. 라이트 목사가 미국에 대해 설교하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거스른 것과 똑같은 실수를 우리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단순화하고, 정형화하고, 부풀려서, 결국 현실을 왜곡하고 마는 실수를요.

지난 몇 주 동안의 발언과 이슈들은, 지금껏 한 번도 제대로 꿰뚫어본 적 없는 이 나라의 인종적 복잡성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완전하게 통합해야 할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이대로 지나가버리면, 각자의 구석으로 물러나버리면, 우리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고, 모든 미국인을 위한 건강보험, 교육, 일자리 같은 과제를 풀어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Understanding this reality requires a reminder of how we arrived at this point. As William Faulkner once wrote, “The past isn´t dead and buried. In fact, it isn´t even past.” We do not need to recite here the history of racial injustice in this country. But we do need to remind ourselves that so many of the disparities that exist in the African-American community today can be directly traced to inequalities passed on from an earlier generation that suffered under the brutal legacy of slavery and Jim Crow.

이러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지를 상기시켜줄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윌리엄 포크너는 “과거는 죽어 묻혀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과거도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 나라의 인종차별 역사를 끄집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 미국 흑인사회가 겪는 많은 차별이, 노예제도와 짐 크로의 무자비한 유산하에서 고통 받은 조상 때부터 이어져온 불평등에 직접적으로 기인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William Faulkner: 1949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 ‘고함과 분노’ ‘압살롬, 압살롬’ 등 다수의 저서를 남김.)

(Jim Crow: 1830년대 이후 백인들이 흑인 분장을 하고 흑인 흉내를 낸 ‘minstrel show’에 나오는 등장인물. 19세기말에 이르러 남부를 중심으로 실시된 흑백분리정책 전반을 지칭하기 시작했다.)

Segregated schools were, and are, inferior schools; we still haven´t fixed them, fifty years after Brown v. Board of Education, and the inferior education they provided, then and now, helps explain the pervasive achievement gap between today´s black and white students.

Legalized discrimination - where blacks were prevented, often through violence, from owning property, or loans were not granted to African-American business owners, or black homeowners could not access FHA mortgages, or blacks were excluded from unions, or the police force, or fire departments - meant that black families could not amass any meaningful wealth to bequeath to future generations. That history helps explain the wealth and income gap between black and white, and the concentrated pockets of poverty that persists in so many of today´s urban and rural communities.

인종 분리 학교들은 열악했고, 지금도 열악합니다.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 판결이 난 지 5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환경이 개선되지 않고 그때나 지금이나 열악한 학교 교육은, 오늘날 흑인 학생과 백인 학생의 성취도 차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법적 차별은 어떻습니까. 흑인은 종종 폭행을 당하면서까지 재산 소유를 방해받았고, 흑인 사업가들에겐 은행대출이 안 됐고, 흑인은 주택을 소유했더라도 FHA 모기지를 이용할 수 없었으며, 노동조합에서도 배제되고, 경찰이나 소방서 근무도 할 수 없었지요. 이런 법적 차별로 인해 흑인 가족은 후손에게 물려줄 만한 재산을 축적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흑인과 백인의 부와 소득 격차, 그리고 상당수 도시와 교외에 존재하는 빈곤층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Brown v. Board of Education: 1954년의 대법원 판결. 집에서 가까운 백인학교에 흑인자녀를 보내려는 올리버 브라운이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이 대법원 판결은 이후 흑백분리정책을 폐지하는 법적인 토대가 됐다.)

(FHA mortgages: 연방주택관리국(Federal Housing Administration)에서 주관하는 주택담보 장기융자.)

A lack of economic opportunity among black men, and the shame and frustration that came from not being able to provide for one´s family, contributed to the erosion of black families - a problem that welfare policies for many years may have worsened. And the lack of basic services in so many urban black neighborhoods - parks for kids to play in, police walking the beat, regular garbage pick-up and building code enforcement - all helped create a cycle of violence, blight and neglect that continue to haunt us.

경제적 기회가 결여되고,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수치심과 좌절은 흑인 가족을 곤경에 빠뜨렸고, 국가 복지정책으로 인해 악화됐을 겁니다. 흑인이 거주하는 많은 도시 지역에 대한 기초 서비스, 이를테면 아이들을 위한 공원, 경찰의 순찰, 규칙적인 쓰레기 수거, 건축물 규제 등이 결여됨에 따라 폭력과 황폐, 방치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This is the reality in which Rev. Wright and other African-Americans of his generation grew up. They came of age in the late fifties and early sixties, a time when segregation was still the law of the land and opportunity was systematically constricted. What´s remarkable is not how many failed in the face of discrimination, but rather how many men and women overcame the odds; how many were able to make a way out of no way for those like me who would come after them.

이것이 바로 라이트 목사와 그 세대의 흑인 미국인이 자라온 환경입니다. 이들은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성인이 되었는데, 당시 흑백분리가 법으로 존재하고 있어 제도적으로 흑인에 대한 기회를 제한했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한 차별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좌절했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곤란을 극복하고 나 같은 후손을 위해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But for all those who scratched and clawed their way to get a piece of the American Dream, there were many who didn´t make it - those who were ultimately defeated, in one way or another, by discrimination. That legacy of defeat was passed on to future generations - those young men and, increasingly, young women who we see standing on street corners or languishing in our prisons, without hope or prospects for the future. Even for those blacks who did make it, questions of race, and racism, continue to define their world view in fundamental ways. For the men and women of Rev. Wright´s generation, the memories of humiliation and doubt and fear have not gone away; nor has the anger and the bitterness of those years. That anger may not get expressed in public, in front of white co-workers or white friends. But it does find voice in the barbershop or around the kitchen table. At times, that anger is exploited by politicians, to gin up votes along racial lines, or to make up for a politician´s own failings.

그러나 역경을 딛고 한 조각의 아메리칸 드림을 차지한 사람에 비해, 그러지 못한 사람들, 어떤 식으로든 차별에 의해 결국 패배한 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 패배의 유산은 후손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젊은 청년이나, 점점 더 많은 젊은 여성이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 없이 길모퉁이를 서성이거나 감옥에서 병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공했다고 하는 흑인들조차도 인종과 인종주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세계관을 그런 근본적인 방식으로 한정짓습니다. 라이트 목사와 같은 세대의 남녀에게서 굴욕과 의심, 두려움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으며, 과거의 분노와 쓰라림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분노가 공개적으로, 백인 동료나 친구들 앞에서 표출되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이발소나 밥상 앞에서 목소리를 내지요. 때때로 정치가들이 인종에 호소해 표를 얻으려고 하거나, 자기 자신의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서 이런 분노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And occasionally it finds voice in the church on Sunday morning, in the pulpit and in the pews. The fact that so many people are surprised to hear that anger in some of Rev. Wright´s sermons simply reminds us of the old truism that the most segregated hour in American life occurs on Sunday morning. That anger is not always productive; indeed, all too often it distracts attention from solving real problems; it keeps us from squarely facing our own complicity in our condition, and prevents the African-American community from forging the alliances it needs to bring about real change. But the anger is real; it is powerful; and to simply wish it away, to condemn it without understanding its roots, only serves to widen the chasm of misunderstanding that exists between the races.

그 노여움이 일요일 아침 교회에서 목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라이트 목사의 설교 일부에 드러난 노여움을 듣고 아주 많은 사람이 놀랐다는 사실은, 미국인의 삶에서 일요일 아침이 가장 인종 분리된 시간이라는 자명한 이치를 상기시켜줄 따름입니다. 그러한 노여움이 항상 생산적인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 대한 관심을 흩뜨리고, 우리가 각자 처한 현실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하게 하며, 미국 흑인사회가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연대하는 것도 방해합니다. 그러나 그 노여움은 실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력합니다. 단순히 사라지기를 바라고, 그 뿌리에 대한 이해 없이 비난하는 것은 인종 간에 존재하는 오해의 수렁을 넓힐 뿐입니다.

In fact, a similar anger exists within segments of the white community. Most working- and middle-class white Americans don´t feel that they have been particularly privileged by their race. Their experience is the immigrant experience - as far as they´re concerned, no one´s handed them anything, they´ve built it from scratch. They´ve worked hard all their lives, many times only to see their jobs shipped overseas or their pension dumped after a lifetime of labor. They are anxious about their futures, and feel their dreams slipping away; in an era of stagnant wages and global competition, opportunity comes to be seen as a zero sum game, in which your dreams come at my expense. So when they are told to bus their children to a school across town; when they hear that an African-American is getting an advantage in landing a good job or a spot in a good college because of an injustice that they themselves never committed; when they´re told that their fears about crime in urban neighborhoods are somehow prejudiced, resentment builds over time.

사실 이와 유사한 노여움이 백인 사회 일부에도 존재합니다. 대부분의 백인 중산-노동자계층은 자신들이 인종적 혜택을 받아왔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은 이민자의 삶입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유산을 남겨주지 않았으며, 순전히 무에서 유를 창조했습니다. 그들은 평생 열심히 일했지만, 많은 경우 자신의 일터가 해외로 빠져나가거나, 평생 일해서 모은 연금이 헐값이 되는 걸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미래를 걱정하며, 자신의 꿈이 미끄러져 나가버리는 것을 느낍니다. 동결된 임금과 세계 경쟁으로 인해, 기회는 제로섬 게임으로 비칩니다. 남의 성공은 곧 나의 희생을 대가로 한다고 보는 거죠. 그리하여 자녀를 멀리 떨어진 학교에 버스 태워 보내야 할 때, 좋은 직장을 얻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데 흑인에게 혜택이 주어진다는 소식을 들을 때, 그리고 도시 주택가 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선입관에 기인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 그들에게 분노가 쌓입니다.

(제로섬게임: 경제학에서 발달한 게임이론의 한 형식. 게임 참여자의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면 ‘0’이 나오므로 ‘영합게임’이라고도 한다. 이 게임에서는 상대의 이익은 곧 나의 손실로 연결된다.)

Like the anger within the black community, these resentments aren´t always expressed in polite company. But they have helped shape the political landscape for at least a generation. Anger over welfare and affirmative action helped forge the Reagan Coalition. Politicians routinely exploited fears of crime for their own electoral ends. Talk show hosts and conservative commentators built entire careers unmasking bogus claims of racism while dismissing legitimate discussions of racial injustice and inequality as mere political correctness or reverse racism.

흑인사회의 분노와 마찬가지로, 백인사회 일부의 이런 분노 역시 교양 있는 모임에서는 잘 표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는 적어도 한 세대의 정치적 지형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습니다. 복지와 차별철폐조처에 대한 노여움은 레이건 연대 형성에 일조했습니다. 정치인들은 선거에서 이길 목적으로 공공연하게 범죄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했습니다. 토크쇼 진행자들과 보수논객들은 인종차별과 부당성에 대한 정당한 토론조차 단순히 정치적 신중함이나 역인종차별이라고 깎아내림으로써 명성을 쌓았습니다.

(political correctness: 성, 인종, 장애 등으로 인해 불리한 여건에 있는 사회적 소수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신중한 태도나 정책을 의미한다.)

(Reagan Coalition: 1980년과 1984년에 공화당 레이건 후보에게 투표한 정치세력. 사회경제적으로 보수 성향을 띤 백인 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민주당원이면서 레이건에 투표한 사람들은 Reagan Democrats로 불렸다.)

Just as black anger often proved counterproductive, so have these white resentments distracted attention from the real culprits of the middle-class squeeze - a corporate culture rife with inside dealing, questionable accounting practices and short-term greed; a Washington dominated by lobbyists and special interests; economic policies that favor the few over the many. And yet, to wish away the resentments of white Americans, to label them as misguided or even racist, without recognizing they are grounded in legitimate concerns - this too widens the racial divide, and blocks the path to understanding.

흑인의 노여움이 종종 반(反)생산적이었던 것처럼, 백인의 분노 역시 중산층을 쥐어짜는 실체로부터 관심을 흩뜨려놓았습니다. 정작 주범은, 빈발하는 내부거래와 의문투성이 회계 처리, 단기 이익에 급급한 기업문화, 로비스트와 특수 이익단체들이 장악한 워싱턴, 다수가 아닌 소수를 위한 경제 정책인데 말이죠. 그럼에도 미국 백인의 분노가 사라지기만 바라고, 그들이 오해하고 있다거나 심지어는 인종주의자라고 분류하면서, 그들이 걱정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면, 이 또한 인종 간의 거리를 넓히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듭니다.

(워싱턴 D.C.에는 입법 활동을 하는 연방의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로비스트나 이익집단들이 상주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미 의회는, 워싱턴에 상주할 수 없는 다수보다 오히려 소수의 이해를 많이 반영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questionable accounting practices: 분식회계 등을 통해 회사의 가치를 부풀려 주식가격을 조작하는 행위.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단기 이익에 민감한 주주 및 전문경영인들이 활용하는 경우가 있다.)

This is where we are right now. It´s a racial stalemate we´ve been stuck in for years. Contrary to the claims of some of my critics, black and white, I have never been so naive as to believe that we can get beyond our racial divisions in a single election cycle, or with a single candidacy - particularly a candidacy as imperfect as my own.

But I have asserted a firm conviction - a conviction rooted in my faith in God and my faith in the American people - that working together we can move beyond some of our old racial wounds, and that in fact we have no choice if we are to continue on the path of a more perfect union.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수년째 인종적 교착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흑인이건 백인이건 저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단 한 번의 선거와 단 한 사람의 후보자, 특히나 저처럼 불완전한 후보자로 인해 우리가 인종 갈등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의 신앙과 미국 국민에 대한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굳은 확신이 있습니다. 함께 노력한다면 오랜 인종적 상처를 딛고 나아갈 수 있으며, 보다 완전한 통합의 길로 계속 나아가기 위해선 실상 그것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입니다.

For the African-American community, that path means embracing the burdens of our past without becoming victims of our past. It means continuing to insist on a full measure of justice in every aspect of American life. But it also means binding our particular grievances - for better health care, and better schools, and better jobs - to the larger aspirations of all Americans, the white woman struggling to break the glass ceiling, the white man whose been laid off, the immigrant trying to feed his family. And it means taking full responsibility for own lives - by demanding more from our fathers, and spending more time with our children, and reading to them, and teaching them that while they may face challenges and discrimination in their own lives, they must never succumb to despair or cynicism; they must always believe that they can write their own destiny.

미국 흑인들에게 있어, 통합으로 향하는 길은 과거의 제물이 되지 않으면서 과거의 짐을 포용하는 것입니다. 곧 미국인 삶의 모든 측면에서 정의를 실현할 온전한 조처들을 끊임없이 주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각자의 욕구, 이를테면 더 나은 건강보험, 더 좋은 학교와 직장 같은 개개인의 바람 모든 미국인, 그러니까 유리천장을 뚫고자 하는 백인 여성, 실직한 백인 남성,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이민자를 포함한 모든 미국인의 보다 큰 염원과 결부시켜야 합니다. 이는 다시 우리가 각자의 삶에 온전한 책임을 져야 함을 뜻합니다. 부모에게 더욱 헌신하고, 자녀에게 더 많은 시간을 내어 책을 읽어주면서 말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살면서 역경과 차별에 맞닥뜨리더라도 절대 절망하거나 냉소해서는 안 되며,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Ironically, this quintessentially American - and yes, conservative - notion of self-help found frequent expression in Reverend Wright´s sermons. But what my former pastor too often failed to understand is that embarking on a program of self-help also requires a belief that society can change.

The profound mistake of Rev. Wright´s sermons is not that he spoke about racism in our society. It´s that he spoke as if our society was static; as if no progress has been made; as if this country - a country that has made it possible for one of his own members to run for the highest office in the land and build a coalition of white and black, Latino and Asian, rich and poor, young and old - is still irrevocably bound to a tragic past. But what we know - what we have seen - is that America can change. That is the true genius of this nation. What we have already achieved gives us hope - the audacity to hope - for what we can and must achieve tomorrow.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전형적인 미국식, 그렇죠, 보수적인 자립 개념이 라이트 목사의 설교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과거 나의 담임목사였던 그가 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립 프로그램을 시작하려면, 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라이트 목사 설교의 심각한 문제점은 인종주의에 대해 언급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마치 우리 사회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말한 점입니다. 마치 진보가 없었던 것처럼, 자신의 신자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백인, 흑인, 라틴계, 아시아인, 부자와 가난한 자, 젊은이와 노인의 연대를 구축하고 있는데도 이 나라가 여전히 비극적인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 게 잘못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듯 미국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미국의 진정한 능력입니다. 우리가 이미 이루어낸 것들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앞으로 우리가 이룰 수 있으며 이뤄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 희망할 수 있도록 담대함을 줍니다.

In the white community, the path to a more perfect union means acknowledging that what ails the African-American community does not just exist in the minds of black people; that the legacy of discrimination - and current incidents of discrimination, while less overt than in the past - are real and must be addressed. Not just with words, but with deeds - by investing in our schools and our communities; by enforcing our civil rights laws and ensuring fairness in our criminal justice system; by providing this generation with ladders of opportunity that were unavailable for previous generations. It requires all Americans to realize that your dreams do not have to come at the expense of my dreams; that investing in the health, welfare and education of black and brown and white children will ultimately help all of America prosper.

보다 완전한 통합으로 이르는 길이 백인에겐, 흑인들을 괴롭히는 것이 단지 흑인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인종차별의 유산이 아님을 깨닫는 걸 의미합니다. 과거만큼 노골적이진 않지만 차별이 분명 존재하고, 처리되어야 한다는 걸 인식해야 합니다. 말만이 아니라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학교와 지역사회에 투자하고, 인권법을 강화하고, 사법시스템의 공정성을 확보함으로써 앞선 세대가 누리지 못한 기회의 사다리를 현 세대에게는 제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미국인이, 네가 꿈을 이룬다고 해서 내가 희생되는 건 아니며, 흑인, 갈색인, 백인 아이들을 위한 건강과 복지, 교육에 대한 투자가 궁극적으로는 미국 전체의 번영으로 이어질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In the end, then, what is called for is nothing more, and nothing less, than what all the world´s great religions demand - that we do unto others as we would have them do unto us. Let us be our brother´s keeper, scripture tells us. Let us be our sister´s keeper. Let us find that common stake we all have in one another, and let our politics reflect that spirit as well.

결국,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이 강조했던,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성서에 씌어 있는 것처럼, 우리 형제의 파수꾼이 됩시다. 우리 자매의 파수꾼이 됩시다.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의 바람을 찾아서, 우리 정치가 그것을 반영하도록 합시다.

For we have a choice in this country. We can accept a politics that breeds division, and conflict, and cynicism. We can tackle race only as spectacle - as we did in the O.J. trial - or in the wake of tragedy, as we did in the aftermath of Katrina - or as fodder for the nightly news. We can play Rev. Wright´s sermons on every channel, every day and talk about them from now until the election, and make the only question in this campaign whether or not the American people think that I somehow believe or sympathize with his most offensive words. We can pounce on some gaffe by a Hillary supporter as evidence that she´s playing the race card, or we can speculate on whether white men will all flock to John McCain in the general election regardless of his policies.

우리에겐 선택권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열과 갈등, 냉소주의를 키우는 정치를 수용할 수도 있습니다. O. J. 심슨 소송 때 그러했듯 인종문제를 단순히 구경거리로 다룰 수도 있고, 카트리나 참사 때 그랬던 것처럼 비극을 일깨우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심야 뉴스의 소재로 다룰 수도 있지요. 라이트 목사의 설교를 매일 모든 채널에서 방송할 수 있고, 지금부터 그에 관한 얘기만 하고, 이번 선거 캠페인의 쟁점을, 제가 라이트 목사의 설교를 신봉하거나 공감하는지 여부로 한정지을 수도 있습니다. 힐러리 상원의원 지지자의 실수를 걸고넘어지며, 힐러리 상원의원이 인종카드를 사용하고 있다고 맹비난을 퍼부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정책과 무관하게 백인들이 모두 존 매케인에게로 결집할 거라고 억측을 할 수도 있습니다.

(O. J. Trial: 1994년 유명 미식축구선수 출신 영화배우인 O. J. Simpson이 이혼한 백인 여성과 그 애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으나, 형사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민사재판에서는 유죄가 인정됐다. 체포과정에서 경찰차가 100km를 추격하는 장면이 매스컴에 보도됐으며,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국민적인 관심을 끌었다. 돈과 권력, 스포츠 스타, 인종문제, 가정폭력, 언론의 광기가 한데 어우러진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됐다.)

(Katrina: 2005년 8월 말에 미국 남부를 강타한 대형 허리케인. 미시시피 제방의 보수가 지연되고 이것이 무너지면서 강물이 범람해, 뉴올리언스를 중심으로 저지대에 살고 있던 흑인 및 소수인종들이 막대한 피해를 당했다. 미국 내에 인종차별이 계속되고 있다는 치부가 여실히 드러났다.)

We can do that.

But if we do, I can tell you that in the next election, we´ll be talking about some other distraction. And then another one. And then another one. And nothing will change. That is one option.

Or, at this moment, in this election, we can come together and say, “Not this time.” This time we want to talk about the crumbling schools that are stealing the future of black children and white children and Asian children and Hispanic children and Native American children. This time we want to reject the cynicism that tells us that these kids can´t learn; that those kids who don´t look like us are somebody else´s problem. The children of America are not those kids, they are our kids, and we will not let them fall behind in a 21st century economy. Not this time.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다음 선거에서는 다른 얘기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릴 겁니다. 그 다음 선거에도, 그 다음에도 또 그러겠죠. 그러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이게 한 가지 선택입니다.

그게 아니면, 바로 이 시점,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함께 나아가 ‘이번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흑인 어린이, 백인 어린이, 아시아인 어린이, 히스패닉 어린이, 그리고 인디언 원주민 어린이의 미래를 앗아가는 붕괴된 학교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이 아이들은 배울 능력이 없다’거나 ‘우리와 다르게 생긴 아이들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냉소주의를 거부하고 싶습니다. 미국의 어린이들은 그들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이며, 우리는 아이들이 21세기 경제에서 뒤처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아닙니다.

This time we want to talk about how the lines in the emergency room are filled with whites and blacks and Hispanics who do not have health care, who don´t have the power on their own to overcome the special interests in Washington, but who can take them on if we do it together.

This time we want to talk about the shuttered mills that once provided a decent life for men and women of every race, and the homes for sale that once belonged to Americans from every religion, every region, every walk of life. This time we want to talk about the fact that the real problem is not that someone who doesn´t look like you might take your job; it´s that the corporation you work for will ship it overseas for nothing more than a profit.

이번에 우리는 백인과 흑인, 히스패닉이 건강보험에 들지 않았음에도 병원 응급실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들에겐 워싱턴을 장악한 특수 이해집단을 이겨낼 힘이 없지만,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한때 모든 인종의 남녀에게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영위하도록 했던 제분소가 문을 닫은 까닭에 대해, 한때 각기 다른 종교와 지역, 계층의 미국인이 소유했으나 지금은 매물로 나와 있는 집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진정한 문제는 당신과 다르게 생긴 사람이 당신의 일자리를 가로채는 게 아니라, 당신이 일하는 회사가 오로지 이윤을 위해 해외로 옮겨갈 거라는 점임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This time we want to talk about the men and women of every color and creed who serve together, and fight together, and bleed together under the same proud flag. We want to talk about how to bring them home from a war that never should´ve been authorized and never should´ve been waged, and we want to talk about how we´ll show our patriotism by caring for them, and their families, and giving them the benefits they have earned.

이번에 우리는 자랑스러운 같은 깃발 아래서 함께 봉사하고, 싸우고, 피 흘리는 각기 다른 피부색과 종교를 가진 남녀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절대 승인되지 말았어야 했으며, 벌어지지 말아야 했던 전쟁으로부터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방법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또한 그들과 그들의 가족을 보살피고, 그들이 벌어들인 이익을 그들에게 돌려줌으로써 우리의 애국심을 표현할 방법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I would not be running for president if I didn´t believe with all my heart that this is what the vast majority of Americans want for this country. This union may never be perfect, but generation after generation has shown that it can always be perfected. And today, whenever I find myself feeling doubtful or cynical about this possibility, what gives me the most hope is the next generation - the young people whose attitudes and beliefs and openness to change have already made history in this election.

대다수 미국인이 이 나라를 위해 원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라고 온 마음으로 믿지 않았다면, 나는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 않았을 겁니다. 대다수 미국인이 원하는 통합이 결코 완전하진 않지만, 세대가 바뀌면서 늘 완전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가능성에 대해 미심쩍거나 냉소적인 느낌이 들 때마다, 제게 가장 큰 희망을 주는 건 다음 세대입니다. 변화에 대한 그들의 태도와 신념과 열린 마음은 이미 이번 선거에서 새 역사를 만들어냈습니다.

There is one story in particularly that I´d like to leave you with today - a story I told when I had the great honor of speaking on Dr. King´s birthday at his home church, Ebenezer Baptist, in Atlanta.

There is a young, 23-year-old white woman named Ashley Baia who organized for our campaign in Florence, South Carolina. She had been working to organize a mostly African-American community since the beginning of this campaign, and one day she was at a roundtable discussion where everyone went around telling their story and why they were there.

오늘 특별히 여러분께 남기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생일에 애틀랜타에 있는 그의 교회본당에서 연설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23세의 백인 여성이 있습니다. 이름은 애슐리 바이아. 그녀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플로렌스에서 우리의 선거운동을 위해 조직을 꾸렸습니다. 그녀는 선거 캠페인 초기부터 주로 흑인 공동체를 조직해왔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모여서 왜 선거 캠페인에 참여하게 됐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그녀도 끼어 있었습니다.

And Ashley said that when she was 9 years old, her mother got cancer. And because she had to miss days of work, she was let go and lost her health care. They had to file for bankruptcy, and that´s when Ashley decided that she had to do something to help her mom.

She knew that food was one of their most expensive costs, and so Ashley convinced her mother that what she really liked and really wanted to eat more than anything else was mustard and relish sandwiches. Because that was the cheapest way to eat.

애슐리는 자신이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며칠 결근을 했고, 결국 그로 인해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건강보험도 상실했지요. 애슐리 가족은 파산 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고, 애슐리는 그때 어머니를 돕기 위해 뭔가 해야만 한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생활비 중 식비가 가장 많이 든다는 걸 알았고, 어머니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먹고 싶은 것은 겨자소스가 들어간 샌드위치라고 거짓말했습니다. 당시 그게 가장 저렴하게 끼니를 때우는 방법이었거든요.

She did this for a year until her mom got better, and she told everyone at the roundtable that the reason she joined our campaign was so that she could help the millions of other children in the country who want and need to help their parents, too.

Now Ashley might have made a different choice. Perhaps somebody told her along the way that the source of her mother´s problems were blacks who were on welfare and too lazy to work, or Hispanics who were coming into the country illegally. But she didn´t. She sought out allies in her fight against injustice.

애슐리는 엄마의 병이 나을 때까지 1년 동안 그렇게 했습니다. 그녀는 토론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선거운동에 동참한 이유는 자신처럼 부모를 돕고 싶고, 또 도와야만 하는 수백만의 어린이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애슐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마 혹자는 그녀에게, 네 엄마의 문제는 복지 혜택을 받으면서 일 안 하고 게으르게 사는 흑인이나 히스패닉 불법 이민자들 때문이라고 말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부당함에 맞서 싸울 연대를 찾아 나섰습니다.

Anyway, Ashley finishes her story and then goes around the room and asks everyone else why they´re supporting the campaign. They all have different stories and reasons. Many bring up a specific issue. And finally they come to this elderly black man who´s been sitting there quietly the entire time. And Ashley asks him why he´s there. And he does not bring up a specific issue. He does not say health care or the economy. He does not say education or the war. He does not say that he was there because of Barack Obama. He simply says to everyone in the room, “I am here because of Ashley.”

애슐리는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고, 다른 사람들에게 왜 선거 캠페인에 참여하게 됐는지 물어봅니다. 사람들에겐 저마다 다른 사연과 이유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구체적인 사안들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내 조용히 듣고만 있던 나이 지긋한 흑인 차례가 됐습니다. 애슐리가 이 흑인에게 물었습니다. 흑인은 구체적인 이슈를 들먹이지 않습니다. 건강보험이나 경제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육이나 전쟁에 대한 얘기도 아닙니다. 버락 오바마 때문에 온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짧게, ‘나는 애슐리 때문에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I´m here because of Ashley.” By itself, that single moment of recognition between that young white girl and that old black man is not enough. It is not enough to give health care to the sick, or jobs to the jobless, or education to our children.

But it is where we start. It is where our union grows stronger. And as so many generations have come to realize over the course of the two-hundred and twenty one years since a band of patriots signed that document in Philadelphia, that is where the perfection begins.

‘나는 애슐리 때문에 여기 있습니다.’ 이 말만으로, 젊은 백인 여성과 나이든 흑인 남성 간의 그 짧은 인식의 순간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픈 사람에게 건강보험 혜택을 주고, 실직자에게 일자리를 주고, 우리 아이들에게 교육을 제공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우리의 통합을 더 강하게 성장시키는 지점이 바로 거기입니다. 한 무리의 애국자들이 필라델피아에서 헌법에 서명한 이래로 221년간 수많은 세대가 깨달았던 것처럼, 거기가 바로 완전한 통합의 출발점입니다.

※ 역자 조성준 박정어학원 부사장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대(USC)에서 석사 및 박사과정(국제관계학)을 수료했다.



번역·註/조성준 박정어학원 부사장 pjenglish@hanmail.net

신동아 기사목록|기사제공 : 신동아

by Charlotte | 2008/07/31 02:42 | 트랙백
놀이: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 -스티븐 나흐마노비치-
문화일보 박경일기자
-그럼에도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일반인들의 창조적이고 예술적 능력이 배제된 현대 사회의 삭막함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현대사회의 길이나 다리, 건물, 가구 등이 '가장 값싸고 빠른 방법'으로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이는 시간에 대한 경박한 접근과 시간과 돈을 똑같이 보는 사고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러곤 오늘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물건이 추악한 이유는 사람과 사물사이의 관계가 단절되고, 일과 놀이가 분리됐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일과 일꾼이 하나가 아니고, 자아와 환경이 하나가 아닐 때 결과물의 품질은 관심밖의 일이 된다는 것, 지당한 이야기다.

데일리노컷 박홍규기자
-그는 창조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풀어주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표현해야 하는 모든 것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장애물을 걷고 갇혀 있는 무언가를 풀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창조력이 번뜩이는 순간, 일과 놀이는 하나가 된다고 말한다.

지은이는 아이들이 놀이에 열중한 모습을 예로 든다.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한 순간에 아이와 세상은 다 사라지고 그저 놀이만 남는다고 말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어른들 역시 마찬가지다.

마이너스 요인이라고 생각했던 결핍도 상상력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창조적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끊임없는 연습과 경험, 수많은 실수와 한계의 과정을 맛봐야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창조 혹은 창작은 더욱 빛을 발한다.

또 지은이는 통제와 판단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길 권한다. 자유연상이나 자동기술과 같은 직관과 무의식에서 창조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다가오면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경험과 자세를 유지하면, 창조적 영감은 지속적으로 찾아온다고 말한다. 일과 놀이를 별개로 생각하지 않고 결과를 얻기 위한 연습의 과정을 즐기고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심을 갖고 무의식에 귀 기울일 때 창조는 지속적으로 다가온다.


연합뉴스 황희경기자
-이 과정에서 중독이나 나태, 완벽주의에 대한 집착이나 권위 있는 존재에 대한 비교 등은 극복해야 한다. 작곡가 브람스도 베토벤이라는 존재에 압도당해 1874년 "그 거인(베토벤)이 항상 따라다니는 느낌이 얼마나 끔찍한지 자네는 모를 걸세"라는 편지를 친구에게 보내기도 했다.

극복이 이뤄지면 비로소 창조라는 결실에 다가가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반드시 직업 예술가 같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은 아니다.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강박을 연습으로 바꾸며 영감의 순간을 늘려나간다면 일상적인 삶에서도 창조성이 믿을 만한 도구가 될 것"(231쪽)이기 때문이다.


by Charlotte | 2008/07/05 02:02 | 트랙백
마종일
struggling artist. 마종일은 말 그대로 힘겹게 분투하며 작업하는 아티스트이자 생활인이다.
............(중략).......... 뉴욕에 오기까지 결정이 쉬웠겠는가? 순수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취업을 생각하니
그래도 디자인이 나을 것 같아 시각 디자인을 공부하고 패션 디자인도 공부해 보았지만 모두 그와는 맞지 않았다.
시행착오를 겪고 미대 입시에서 2년 연거푸 고베를 마시면서 그때부터 막노동을 하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막연히 미국에 갈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간다 간다 하면서 정작 가기로 결정했을 때는 정말 가도 되는지
수없이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대학 졸업장도 돈도 없지만 분투하는 그를 뉴욕은 받아 주었다.
멀고 먼 길을 돌고 돌아 뉴욕에 온 지 12년이 지났다. 이제 그의 나이 마흔을 훌쩍 넘겻지만 그는 여전히 뜨겁게 산다.
포기하지 않고 산다.

무모함 속에 길이 있다. 무모하기 전에는 갖지 못했던 에너지를 무모하게 걸어가는 길 위에서 얻을지도  모른다.
무모하게 걷다 보면 당신도 모르는 사이 열린 길이 당신을 인도한다.

네 멋대로 행복해라 중에서...마종일씨 편..
by Charlotte | 2008/06/14 02:20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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